포르투갈의 식민 제국 건설
카테고리: medieval
태그: Portugal
1415년, 포르투갈의 대규모 군대가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북아프리카의 세우타를 점령하며 포르투갈 근대 식민지 개척이 시작되었다1. 포르투갈의 엔히크(Henrique) 항해왕자의 지휘 아래 포르투갈 함대는 아프리카 서쪽 해안선을 따라 남하하며 탐험과 식민 사업을 병행했다.
포르투갈 탐험대는 아프리카 최남단을 지나 동방, 인도와 중국으로 가는 길을 찾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1487년 8월, 바르톨로메우 디아스(Bartholomeu Diaz)가 범선 3척을 이끌고 아프리카 최남단을 향해 출발했다. 태풍과 계절풍의 영향으로 디아스 함대는 희망봉 남쪽 해안에 상륙할 수 밖에 없었다. 폭풍에서 벗어나 다시 육지를 발견한 디아스는 해안선이 남북 방향이 아니라 동서 방향으로 뻗어 있음을 깨달았고, 아프리카 남쪽 해안에 진입했음을 알게 되었다. 디아스는 이곳이 아프리카의 최남단임을 확신하고 ‘폭풍의 곶’이라 명명했다. 당시 국왕이었던 주앙 2세는 이곳을 ‘인도에 닿을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했다’는 의미를 담아 ‘희망봉’이라 명명했다.
1497년,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는 인도를 찾기 위해 포르투갈을 떠났고, 1498년 5월 20일, 다 가마 함대는 인도 서해안의 도시 캘리컷(지금의 코지코드)에 도착했다. 포르투갈의 80여 년간의 노력과 투쟁 끝에 결국 인도항로 개척에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이전까지는 실크로드를 통해 유럽과 인도가 연결되었다.
1500년, 포르투갈 함대가 희망봉을 크게 우회하다가 우연히 브라질을 발견했다. 1530년, 포르투갈 국왕은 대규모 함대를 브라질에 파견하여 ‘상비센치‘라는 도시를 건설하고, 이후 이곳에 정착한 이민자들은 늪지대를 개간하여 사탕수수를 심고, 사탕수수 압착 기계를 설치하며 브라질 개발을 시작했다. 브라질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포르투갈어가 공식 언어인 유일한 국가이다.
1509년, 포르투갈 함대는 인도 디우 앞 바다에서 이슬람-인도 연합함대를 격파하고 인도양을 장악했다. 1511년, 인도 총독(부왕, viceroy)으로 취임한 아폰수 드 알부케르(Afonso de Albuquerque)는 말라카 해협의 관문인 말라카를 정복하였다. 이로써 말루쿠 제도의 향료 섬 대부분을 점령하여 향료 생산과 판매 루트를 독점했다.
1543년, 레오넬 데 소사(Leonel de Sousa)는 중국 동남부 해안을 지나 일본에 도착하여 무역 관계를 맺었다. 1554년, 포르투갈 함대를 이끌고 중국 광둥에 도착한 데 소사는 광둥의 지방관 왕백과 양국 간 정식 무역협정을 체결했다. 1555년, 중국 지방정부의 암묵적인 동의하에 포르투갈인들은 마카오에 거주할 수 있게 되었다.
15세기에 포르투갈인들은 유럽 각국의 지도학 정보를 구하고, 항해를 통해 얻은 지식을 결합해 세계지도를 그려냈다.

16세기 중반, 포르투갈은 브라질에 아메리카 최초의 플랜테이션(plantation) 농장을 만들었다. 이때부터 브라질은 유럽의 주요 설탕 공급지이자 포르투갈의 주요 경제 기지가 되었다.
포르투갈은 “포르투갈-희망봉-인도-말라카-마카오-일본”으로 이어지는 생명선을 지키기 위해 곳곳에 수많은 무장 상업 거점과 군사기지를 세웠다. 특히 동아프리카 탄자니아의 잔지바르(Zanzibar)에 대규모 거점을 건설했는데, 이곳에는 대규모 항구를 비롯하여 도크 시설, 식료품 가공 공장, 기계공장 등이 세워졌다. 이곳은 포르투갈의 중요한 물류 집산지이자 원양항해 선박을 위한 물자 공급 기지였다.
포르투갈 정부는 인도양을 지나는 인도와 아랍 선박을 대상으로 항해허가제를 실시하여 포르투갈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만 인도양을 지날 수 있게 함으로써 인도양 무역을 완전히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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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지아펑 외 7인, 『대국굴기』 - 제1장, 제2장, 크레듀, 2007”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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