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이션은 어떻게 상식이 되었나? 1970년대 대인플레이션 시대가 남긴 5가지 반전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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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던 경제 상식이 무너진 순간

과거의 경제학적 도그마는 명쾌했습니다. 경기가 둔화되면 수요가 줄고 물가는 하락한다는 것이었죠. 하지만 1960년대 후반, 이 견고했던 법칙은 무참히 깨졌습니다. 성장은 정체되는데 물가는 오히려 치솟는 기이한 현상, 즉 ‘새로운 경제 구조’의 등장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상시적 인플레이션’의 시대는 과연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중앙은행의 무력함과 정치적 야욕, 그리고 시장의 심리가 얽히고설킨 1970년대의 기록은 오늘날의 경제 위기를 바라보는 서늘한 거울이 되어줍니다.

주식 시장의 황금기를 이끈 ‘영구적 물가 상승’의 역설

1949년부터 1968년까지 미국 증시가 누렸던 20년의 강세장은 역설적이게도 ‘물가 상승’에 대한 대중의 공포가 확신으로 변하면서 가능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리한 투자자들은 새로운 국제 금융 질서 아래에서 물가 상승이 일시적 현상이 아닌 상시적인 상식이 될 것임을 직감했습니다.

  • 자산의 주식화(Equitization): 1952년에서 1968년 사이, 기관의 총 금융자산이 300% 이상 성장하는 동안 주식 자산은 무려 12배나 폭등했습니다. 투자자들은 인플레이션이 화폐 가치를 갉아먹는 상황에서 기업의 수익성(Margin)이 물가 상승에 비례해 개선될 수 있다는 점에 베팅한 것입니다.

  • 지정학적 촉매제와 스푸트니크: 1957년 소련의 스푸트니크 발사는 미국을 ‘영구적인 군사 국가’로 탈바꿈시켰습니다. 방위 산업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 재정 지출은 인플레이션 압력을 고착화시켰고, 이는 증시 밸류에이션을 끌어올리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 역 수익률 격차(Reverse Yield Gap)의 탄생: 1957년 7월,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주식 배당수익률이 장기국채 수익률보다 낮아지는 ‘역 수익률 격차’가 나타난 것입니다. 채권보다 주식을 선호하게 된 이 심리적 혁명은 1960년대 내내 강세장을 지탱하는 근간이 되었습니다.

정치가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집어삼킬 때 발생하는 일

1960년대 중반, 린든 존슨 대통령의 ‘위대한 사회(Great Society)’ 프로그램과 베트남 전쟁의 확대는 미국 경제를 재정 우위(Fiscal Dominance)의 수렁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복지와 전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총과 버터(Guns and Butter)’ 정책은 천문학적인 재정 적자를 초래했고, FRB는 정치적 압력에 밀려 이를 방어할 동력을 잃었습니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이 훼손된 결정적 장면은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아서 번스 FRB 의장의 관계에서 드러납니다. 1970년, 닉슨은 번스를 의장에 앉히며 노골적인 요구를 던졌습니다.

“저는 그의 독립성을 존중합니다. 하지만 저의 견해가 따를 만한 것이라고 그가 독립적으로 결론 내리기를 희망합니다.”

이 교묘한 압박 아래 번스 의장은 정치적 목적에 부합하는 저금리 정책을 유지했습니다. 물가 안정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할 중앙은행의 평판이 무너지자, 인플레이션은 통제 불능의 상태로 진입했습니다.

‘스태그플레이션’의 탄생과 오일 쇼크의 파괴력

1973년 4월,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전례 없는 경기 침체 속 물가 상승을 가리켜 ‘스태그플레이션’이라 명명했습니다. 뒤이어 터진 두 차례의 오일 쇼크는 불난 집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 데이터의 경고: 1차 오일 쇼크 당시 배럴당 3.12달러였던 유가는 단 두 달 만에 11.63달러로 폭등했고, 1974년 말 소비자물가는 12.5%까지 치솟았습니다. 이어 1979년 이란 혁명으로 인한 2차 쇼크는 1980년 3월 물가 상승률을 사상 최고치인 15%에 육박하게 만들었습니다.

  • 미온적 대처의 대가: 경기 침체를 우려한 FRB는 치솟는 물가에도 불구하고 연방기금 금리를 상대적으로 낮게 유지하는 치명적인 실책을 범했습니다. 인플레이션 기대 심리를 꺾지 못한 미온적인 대응은 경제 구조 전체를 마비시켰습니다.

폴 볼커의 위험한 도박, 금리가 아닌 ‘통화량’을 겨냥하다

1979년 등판한 폴 볼커는 기존의 통화 정책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엎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금리 수치를 조정하는 대신, 인플레이션의 근원인 협의통화(M1)의 유통량 자체를 직접 통제하는 극단적인 처방을 내렸습니다.

이 정책은 시장에 극심한 금리 변동성을 가져왔고 실행 과정에서도 엄청난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1980년, 지미 카터 대통령은 TV 연설을 통해 국민들에게 처절한 고통 분담을 호소했습니다.

“우리 사회 전체, 미국 가족 전체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열심히 수입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개인으로서, 그리고 국가로서 우리는 단기적으로 빌릴 수 있는 것에 따라가 아니라 장기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것에 따라 돈을 쓰기 시작해야 합니다.”

볼커의 도박은 일시적인 GDP 급감과 실업률 상승이라는 혹독한 대가를 치렀지만, 통화 공급의 고삐를 죄어 인플레이션의 척추를 꺾는 데 마침내 성공했습니다.

결론: 역사는 반복되는가?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에서 승리는 단번에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1979년 볼커가 취임하고도 시장이 그를 진심으로 믿기까지는 꼬박 2년의 세월이 더 필요했습니다. 1981년 9월이 되어서야 채권 시장에는 인플레이션이 잡힐 것이라는 ‘믿음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신뢰를 잃기는 쉬워도 다시 쌓는 데는 십수 년의 세월과 막대한 비용이 든다는 사실을 역사는 증명합니다.

정치적 논리가 경제적 원칙을 압도하고, 재정 지출의 유혹이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흔드는 풍경은 결코 과거만의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복잡한 경제 구조 속에서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정치적 편의주의라는 유혹을 뿌리치고, 다시 찾아올 인플레이션 괴물에 맞설 준비가 되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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