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DP의 배신, 현대 경제를 측정하지 못하는 낡은 자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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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성장률이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는 뉴스가 들려와도 정작 우리의 삶은 팍팍하기만 합니다. 지표상으로는 분명 성장을 외치는데, 왜 체감 경기는 제자리걸음일까요? 이는 우리가 경제를 측정하기 위해 사용하는 절대적인 잣대인 ‘GDP(국내총생산)’가 사실은 21세기의 혁신을 담아낼 수 없는, 낡은 20세기 대량 생산 시대의 유물이기 때문입니다. 유형의 물건을 세던 시대에서 코딩과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무게 없는 경제(Weightless Economy)’로의 전환기, 우리가 믿어온 이 오래된 ‘자의 비밀’을 파헤쳐 봅니다.
GDP의 태생은 ‘복지’가 아니라 ‘전쟁’이었다
우리는 GDP가 높으면 국민이 더 행복할 것이라 믿지만, 그 출발점은 전혀 평화롭지 않았습니다. 1665년 영국의 윌리엄 페티(William Petty)가 국가 자산을 처음 추정한 목적은 오로지 전쟁 비용 조달을 위한 과세 자원 파악에 있었습니다.
“통계를 뜻하는 영어 statistics는 국가를 뜻하는 state와 어원이 동일하며, 본래 뜻은 국가와 관련된, 구체적으로는 세금과 관련된 숫자의 집계였다.”
통계는 태생적으로 국가의 통치와 전투력을 측정하기 위한 도구였지, 국민의 삶의 질을 살피기 위한 지표가 아니었습니다. GDP가 태생적으로 ‘산출량’에만 집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아담 스미스가 비생산적이라 비웃은 서비스업, ‘신고전학파’가 구제하다
흥미로운 사실은 ‘경제학의 아버지’ 아담 스미스조차 오늘날 경제의 80%를 차지하는 서비스업을 무시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국부론》에서 농업과 산업처럼 물리적인 상품을 생산하는 노동만을 ‘생산적’이라 보았고, 서비스는 경제 발전을 방해하는 ‘비용’으로 취급했습니다.
이러한 편견은 19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깨졌습니다. 신고전학파(Neoclassical) 경제학자들이 생산적 활동과 비생산적 활동의 구분을 없애면서 서비스가 비로소 국민소득의 정의에 포함된 것입니다. 만약 이 지적 전환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구글이나 넷플릭스가 만들어내는 가치는 여전히 ‘경제적 소음’에 불과했을지도 모릅니다.
케인스와 쿠즈네츠, GDP를 ‘정부의 도구’로 만들다
현대적 GDP 체계가 확립된 1930년대, 사이먼 쿠즈네츠(Simon Kuznets)는 GDP가 ‘산출’이 아닌 ‘후생(Welfare)’을 측정해야 한다고 경고했습니다. 그는 군비 지출, 광고비, 금융 투기 등 사회적 이로움을 주지 못하는 요소를 총계에서 제외하려 했습니다.
“후생은 평화기에나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하지만 대공황과 전쟁의 긴박함은 쿠즈네츠의 철학적 고민을 삼켜버렸습니다. 특히 1936년 등장한 케인스(Keynes) 이론은 정부 지출을 GDP에 포함하며, GDP를 단순한 지표에서 ‘정부의 관리 도구’로 격상시켰습니다. 이때부터 GDP는 경제의 변동성을 줄이고 성장을 자극하기 위한 정책적 수단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무게 없는 경제, ‘50년의 시차’에 갇힌 생산성
오늘날 우리는 물리적 실체가 없는 소프트웨어나 콘텐츠가 가치를 창출하는 ‘무게 없는 경제’ 속에 살고 있습니다. 1987년 로버트 솔로는 “어디를 가도 컴퓨터 시대를 볼 수 있지만, 생산성 통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라는 ‘생산성 역설’을 지적했습니다.
왜 디지털 혁신은 GDP 수치에 즉각 나타나지 않을까요? 경제사학자 폴 데이비드(Paul David)에 따르면, 신기술이 통계적 수치로 증명되기까지는 보통 50년 이상의 시차가 발생합니다. 기업 조직이 재정비되고 기술이 보편화되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목격하는 인공지능(AI)의 영향력 역시 공식 통계보다는 메타(META)와 같은 빅테크 기업의 실적에서 먼저 확인되는 ‘선행 지표’적 성격을 띱니다. 헤도닉 가격 모형(Hedonic Price Model)으로 품질 향상을 반영하려 애쓰지만, 1조 배 이상 향상된 컴퓨터의 연산 능력을 측정하기에 GDP라는 그릇은 너무나 작습니다.
‘버핏 지수’가 고장 난 이유: 구성의 불일치(Mismatch of Composition)
시가총액을 GDP로 나눈 ‘버핏 지수’가 최근 역사적 평균을 크게 웃도는 이유는 시장이 과열되어서만이 아닙니다. 이는 측정 대상인 ‘주식 시장’과 측정 도구인 ‘GDP’ 사이의 ‘구성의 불일치(Mismatch of Composition)’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주식 시장은 혁신적인 무형 자산과 글로벌 비즈니스를 수행하는 기업들이 주도합니다. 반면 GDP는 여전히 물리적이고 유형적인 생산물, 그리고 국내 거주자의 생산 활동이라는 낡은 체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21세기의 엔진(주식 시장)을 20세기의 계기판(GDP)으로 측정하려다 보니 둘 사이의 괴리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결론: 투자자를 위한 새로운 나침반이 필요한 때
GDP는 분명 20세기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정교한 지표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혁신과 품질, 무형의 가치가 주도하는 현시대의 복잡성을 담아내기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습니다.
특히 국가 간의 투자 가치를 판단할 때 GDP를 기준으로 주식, 채권, 외환 시장을 비교하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유형의 물건을 세던 낡은 측정 방식에서 벗어나, 보이지 않는 가치와 혁신의 흐름을 읽어내는 혜안이 필요합니다. 이제 우리는 낡은 GDP의 배신을 인정하고, AI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경제적 나침반’을 찾아야 할 시점에 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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